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6 군사정변 (문단 편집) === 박정희 개인의 상황 === [[박정희]]는 [[여수·순천 10.19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백선엽]]이나 [[원용덕]]과 같은 [[대한민국 육군|육군]] 원로들의 옹호와 [[남조선로동당|남로당]] 간부들에 대한 정보 제공으로 사형은 면하고 예편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이후 민간인 신분으로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국 문관으로 재직했다. [[1950년]] [[6월 23일]]경 박정희는 북쪽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뭔가 이상하다고 상부에 보고했으나 묵살되었고 [[6.25 전쟁|그 결과가...]] 다만, 이 당시에 북한이 침공할 것이라는 미군과 국군의 보고서는 전쟁 발발 전부터 수없이 많았기 때문에 상부에서 이런 보고를 묵살 내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이다. [* 한편 [[김종필]]은 전쟁 발발 당시 [[대한민국 육군본부]] 상황실에서 당직을 서고 있었다.] 이후 사상전향을 인정받아 전시에 장교로 복직하여 군인으로서의 능력이 뛰어나 승진을 거듭하며 군맥을 쌓을 수 있었다. 사실 6.25 직전 박정희는 숙군 연루자로 군부에서 언제 잘려도 모르는 상황이었고, [[이화여대]]생이었던 내연녀 [[이현란]]과의 문제로 안 그래도 좋지 않던 결혼 생활도 파탄이 났다. 당시 박정희 주변 인사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율리시스 S. 그랜트|매일마다 술이나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기 일쑤였고]], 월급은 술집 외상값 갚기도 바빴다고 한다. 다시 말해 완전 폐인 상태. 이런 상황이 지속됐다면 박정희는 범인으로 살다 갈 팔자였다. [[6.25 전쟁]] 때 박정희는 포병 [[소령]] 계급을 달고 군인으로 복직되었다. 그 후 군 생활을 이어가면서 [[준장]], [[소장(계급)|소장]]으로 차례로 진급하였다. 진급 자체는 그다지 순조롭지 않았는데 [[미국]] 측은 [[박정희]]의 [[남조선로동당|남로당]] 전력을 문제 삼았고 [[준장]], [[소장(계급)|소장]] 진급 때마다 태클이 들어왔으나 [[백선엽]] 장군 등의 적극적인 변호로 무사히 진급할 수 있었다. 박정희는 6군단 부군단장, 군수기지사령관, 육본 작전참모부장 등의 요직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정변 당시에는 제2[[야전군]]사령부(현 [[제2작전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재직 중이었다. 군 생활 동안 [[박정희]]는 정권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찍혀 있었다. 그것은 박정희의 기질 때문이었다. 첫째, 박정희는 [[남조선로동당]] 전력이 있었다. 둘째,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당시 [[이승만]]이 국회를 장악하기 위해 4개 소대 병력을 육본에 요청했는데 당시 육군참모총장 [[이종찬]] 장군은 대통령 면전에서 병력파병을 거부한다. 이때 육군본부 제2작전참모부장이였던 포병[[대령]] 박정희는 "육군장병들에게 고함"이라는 훈령(217호)을 기초하여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고 현재 자신의 임무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였다. 1960년 [[3.15 부정선거]]가 터지자, 박정희는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자신이 집권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 포항에 주둔한 [[대한민국 해병대]] [[해병대 제1사단|제1사단]][[사단장|장]]인 [[해병]][[소장(계급)|소장]] [[김동하(군인)|김동하]] 장군과 공모하여 5월 8일에 쿠데타를 진행하기로 꾸몄지만 [[4.19 혁명]]이 터지면서 이 역시 종이 위의 구상에 그쳤다. 박정희가 5월 8일을 쿠데타 날로 잡은 것은 5월 6일에 육군참모총장 송요찬이 미국으로 해외출장을 떠나기 때문이었다. 즉, 참모총장이 자리를 비웠을 때 거사를 하려고 한 셈. 하지만 박정희는 [[1960년]] [[5월 2일]],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송요찬]] 장군을 위시로 한 수뇌부에 [[3.15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을 요구하기도 했으며, [[김종필]] [[중령]]을 필두로 한 육사 8기생 중령들의 연판장이 돌아 수뇌부 불신을 천명하자 [[박정희]]를 제거하려던 송요찬은 실각했고 군 수뇌부는 붕괴했다. 정리하면 박정희가 가지고 있던 정치적인 기질이 육본으로 하여금 그를 경계하게 했던 것이다. 박정희가 정변을 입에 담고 다니자 아예 그를 좌천 또는 예편시킬 구체적인 입안을 하게 된다. 특히 과거 좌익에 가담했던 경력까지 문제 삼아서, 결국 육본 작전참모부장에서 2군부사령관으로 좌천당한다.[* 현재와 같이 당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은 대장 진급을 위해선 필수적으로 거쳐가야 할 참모직 중에서 최고의 요직이었다. 그런 자리에서 느닷없이 후방 사령부의 부사령관이라는 한직으로 곤두박질친 셈이다.] 박정희는 대외적으로는 [[4.19 혁명]] 이후의 사회 불안 때문에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부득이 [[정변]]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해명했다. 부패한 정권으로 인한 국민들의 고통은 이승만 정권 이후 장면 내각에서도 지속되었다. 특히 50년대에는 군부대, 특히 육군 부대의 보급물자 유출이 심해 겨울만 되면 동사자가 속출했다. 박정희가 맡은 [[사단(군사)|사단]]은 동사자가 '적어서' 상부의 표창을 받은 적이 있었다. 박정희는 청년 시절부터 야망은 있었던 듯하다. 제자나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교사 시절 문경의 하숙집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초상화를 떡 하니 붙여 놓고 숭배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어느 일요일 동무들 몇 명과 함께 새로 오신 선생님의 하숙집을 찾아갔다. 호기심을 가지고 선생님 방을 살펴봤더니 책상 위에 커다란 사진 액자가 걸려 있었는데 배가 불룩 나오고 앞가슴 양편에 단추가 죽 달려 있는 사람이었다.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은 ‘영웅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고 하시며 나폴레옹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해주셨다.”(이낙선 비망록, 1962)] 박정희는 만주로 가서 만주국 육군에 입대했다. 당시 만주에서도 민족차별은 있었지만, 동양의 서부라 불릴 정도로 혼란한 곳이라 기회를 잡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일에는 사람들로부터 [[터키]]의 [[케말 파샤]]와 비교되기도 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참 군인' [[이순신]]을 많이 존경하고 강조했다. 실제로 당시 CIA한국지국장이었고 훗날 주한미국대사를 역임하는 도널드 그레그가 박정희에게 ‘각하께서 터키의 케말파샤와 비교된다는 걸 아십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이때 박정희는 케말 파샤를 잘 모른다고 대답하기도 했다.[[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477753.html|#]]] 박정희는 또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 갔을 때 일본 황도파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소령으로 복직한 후 [[2.26 사건]]을 거론하며 가까운 장교들에게 "우리도 이런 식의 군사혁명을 해 보자" 등의 이야기를 종종 했다고 한다. [[6.25 전쟁|한국전쟁]] 이후에는 친구인 소설가 이병주에게 "우리도 2.26 사건의 우국 장교들처럼 한번 일어나야 하지 않겠냐"라는 이야기를 대놓고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일본/역사|일본 역사]]를 읽으면서 [[메이지 유신]]처럼 군인이 나서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